<22> 여자와 남자의 끝없는 이야기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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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12-29 02:53 조회3,42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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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인 칼럼 <여자의 신화, 남자의 오해>
여자와 남자의 끝없는 이야기들 1
두각을 나타내는 여자들 : 산업의 발달과 자본주의의 등장으로 인한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맞이 하면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자들이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한다. 공장의 노동자, 농장의 일꾼, 전화교환수와 같은 단순 노동자로부터, 좀 더 세련된 직종으로도 여자들이 진출하게 되면서, 드디어는 회사의 간부자리는 물론 최고 경영자 자리에도 여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여자들의 활동범위와 폭은 점점 더 넓어지고 있는 중이다. 아직도 이 과정은 진행 중에 있으며, 앞으로 얼마나 더 높은 자리에 여자들이 진출할 것인지에 대하여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여자들의 사회진출은 눈부신 바 있다.
여자들의 사회진출이 아무런 저항 없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그 과정에서 여자들은 끊임없는 도전과 질시 그리고 무시를 감내하면서 여자들이 갖고 있는 인내라는 재산이 없었다면,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는 어려움을 견디어내면서 얻은 결과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와 미래의 여자들의 입장이 순조로워진 것만은 아니다. 여자들의 인내심을 강요하는 어려운 도전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으면서 아무 때라도, 어는 곳에서라도 여자들을 괴롭힐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여자들의 능력에 대하여,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바 있다. 단순 노동 일은 여자들이 좀 더 세밀하게 해내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여자들의 위치가 올라가면서 받게 되는 평가는 그렇게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시야가 좁고, 깊이가 없다는 식의 평가도 함께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평가는 남자들이 내린 평가이었고, 그런 남자들의 평가 속에는 질시와 위협이라는 시선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객관적인 결과는 어떤가? 여자들의 작업내용은 남자들과 비교했을 때, 최소한 동등하거나, 아니면 좀 더 월등하다는 전체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에게 열려있는 부문들은 제한적인 것이 보통이다. 여자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단순한 이유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도 남자들이 세운 것이지 여자의 참여가 있은 후에 내린 결정은 아닌 것이다. 여자들은 남자들의 끊임없는 도전을 곳곳에서 받고 있는 것이다. 일할 수 있는 분야의 결정까지도 남자들의 편견과 질시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여자들은 남자들의 고유한 영역에서도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검증 받아야 하는 현실이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다.
여자들의 두각은 일자리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은 아니다. 여자들의 옷매무새를 보면, 여자들의 두각이 나타나면서, 여자들의 개성을 중요시하는 옷차림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들의 전통적인 옷매무새로부터 여자들의 여성스러운 모습을 강조하는 “실루엣(silhouette)”을 중요시하게 된 것이다. 여자들의 유행은 이제 여성시대의 도래를 알리고 있다. 미니스커트와 비키니 수영복은 여자들의 자신감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남자들의 시선을 통한 여성우위를 과시하고 있다. 머리모양도, 긴 머리, 짧은 머리, 파마머리, 스트레이트머리, 얹은머리, 땋은 머리 등 여자들의 개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담대함을 서슴지 않게 된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제는 여자들의 복장은 남자들 고유의 모습도 모방하면서 남자들의 영역으로 확대된 여자들의 취향을 보여주면서 남자들을 위축시키는 담대한 옷차림을 등장시키면서, 편안하기 때문이라는 실용적인 태도까지도 보이고 있다.
여자들의 옷매무새, 머리모양을 비롯하여 각종 장식품들의 표현이 다양해지는 현상에 비추어 볼 때, 남자들의 유행은 예전이나 현대나 별로 변한 것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오히려 남자들의 표현은 점점 간단해지고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일부의 남자들은 여성화된 유행을 따르고 있어 여성화된 남자들의 모습에 별다른 저항을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런 모습에 대하여 남자들은 신기로운 태도를 보여주는 반면에 여자들은 여성화된 남자들을 이상한 눈초리로 보면서 의아해하고 혼란스러운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생리적으로 또한 신체적으로 풍성한 여자들에게는 잘 어울리는 유행이 되겠지만, 이런 면에서 열등한 남자들에게는 하나의 호기심의 발로라는 표현밖에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때 여자들의 남성화, 남자들의 여성화로 이제는 동성화(unisex)적인 유행이라는 새로운 언어까지도 생기게 된 것이다. 동성화는 남자들의 여성화를 의미하는 반면에 여자들에게는 남자고유의 영역으로까지 여자들의 표현이 넓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상식이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제 남자는 절대적인 숫자로 보거나 생리학적 또는 생물학적으로 보거나 열세의 입장에 서있음을 인정하지 않게 될 날들이 오게 될 것이다. 그 동안 여자들은 남자들의 우위에 별다른 저항 없이 열세의 입장을 지켜오고 있었으나, 이제는 여자들은 스스로 자기들의 위치가 남자들에 비해서 결코 열세에 놓여있을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들이 남자들에 비해서 우위에 서겠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여자들에게는, 남자를 돌보는 것은 여자라는 전통적인 입장으로부터 벗어날 의사가 없어 보인다. 집에 있는 아버지, 남자형제들 그리고 남편을 생각하면서 여성본능의 한 가지인 가족을 보호하고 또한 남자를 보호한다는 뜻이 포함된 것이다. 그러나 남자에 비해서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여자라는 점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복종을 강요당해 온 여자들 : 인류의 역사는 수백만 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류학자들의 연구결과는 선사시대 때에도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남자가 우위에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남자들은 사냥을 통해서 건강유지에 절대로 필요한 단백질을 공급하는 반면에, 여자들은 여러 가지의 이유로 인하여, 동굴 근처에 머물면서 채집에 주력했다는 증언인 것이다. 채집은 주로 식물성 내용이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단백질의 공급원이 동물들을 사냥해 온 남자들의 값어치가 상대적으로 올라갈 수밖에는 없었을 것이라는 증언인 것이다. 사냥에 필수인 방향감각이 잘 발달된 선사시대의 남자들로부터 물려받은 현대의 남자들은 오늘날에도, 길을 찾는 데에 여자에 비해서 강하다는 설명이 있는 형편이다. 물론 생활 근거지인 동굴이 거주에 적당한 곳인지에 대한 구별은 여자들이 더 잘 했을 것이라는 주장인 것이다. 이런 형편 속에서 남자가 여자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우위에 서 있었을 것이라는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기록된 역사도 수천 년에 걸친 장구한 세월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의 기록 자체가 남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바에 대하여는 아무 누구도 의문을 표시할 수 없을 것이다. 남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여러 가지의 내용으로 볼 때 여자들의 상대적인 열세가 두드러지게 된다. 여자들의 상대적인 열세는 역사, 전통 및 종교는 물론 문화의 산물인 것이다. “삶에 대한 적응력”으로 표현되는 유전인자의 우열과는 상관없이 역사, 전통 및 문화의 내용으로 남녀 간의 우열이 결정된 것이다. 그것도 남자들이 기록한 역사의 증언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과연 남자가 여자에 비해서 “삶에 대한 적응력”이 뛰어났을까? 전통, 역사 및 문화라는 잣대로 재어 본 내용이 과연 유전인자의 표현으로 결정지어지는 “삶에 대한 적응력”에서 맞아 들어가게 될까? 이는 진정으로 중요한 질문으로, 이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얻기 전에는 어느 누구라도 여자가 남자에 비해서 열등한 위치에 있음으로 복종을 강요당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해본다면, “삶에 대한 적응력”은 여자가 남자에 비해서 월등하다. 이는 여자의 평균수명이 남자에 비해서 6-8년이 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증명이 된다. 즉 남자에 비해서 월등하게 오래 사는 여자들이 삶의 경쟁에서 우월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남자의 우위에 의한 역사, 전통, 종교 및 문화가 지속되어 왔을까?
서양에서는 여자들에게 정조대가 강요된 적이 있었고, 동양에서는 전족을 비롯해서 여자의 실루엣(silhouette)을 감추는 복장을 강요한 전통이 있어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자들은 전쟁의 전리품으로 분류된 적이 비일비재하였고, 이는 현대에 와서도 통하는 말이다. 인류 역사상 여자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적은 아주 드문 사실이었다. 뿐만 아니라 여자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지면서 참정권이 주어진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여자들은 권력 근처에도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권력은 남자들의 전유물이었던 것이다. 이런 모든 사실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이는 다만 남자의 허우대가 크고, 강한 근육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이외에는 다른 아무런 근거도 없이 행하여 왔던 역사적인 사실인 것이다.
여자들의 운명은 어떤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는지에 따라서 극에서 극으로 그 생활의 내용이 결정되면서 행복의 수준이 책정되었던 것이다. 즉 한 여자의 행복여부는 한 남자에 의해서 결정되었던 것이다. 여자들 스스로 인생을 개척한다는 것은 최근에 와서야 이루어질 수 있었던 이상이었고, 전에는 여자란 남자에게 복종을 강요당하는 입장에 서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이런 남성상위의 부부생활을 종종 접하게 된다. 전근대적인 여성 복종을 강요하는 생활인 것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것은 물론 생리학적, 몸의 구조자체 및 유전학적으로도 맞지 않는 남성우위의 생활상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장구한 세월이 걸려야 역사, 전통 및 문화에 입각한 여성의 대남성 복종시대가 그 막을 내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에 대하여 알아 볼 차례가 왔다.
사실들 : 과연 남자가 여자의 복종을 강요할 수 있는 어떤 신체적, 생리적 및 유전적인 사실들이 있는지에 대하여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즉 남자들이 “삶에 대한 적응력”에서 어떤 우위를 차지하고 있기에 여자들에게 남자들의 삶을 따라오라고 강요할 수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아야 할 차례가 온 것이다.
남자의 근육은 여자에 비해서 대략 10% 더 갖고 있다. 그런데 신진대사의 대부분은 근육에서 이루어진다. 남자들의 근육이 여자들의 근육에 비해서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자들의 신진대사는 여자들에 비해서 약 5-6% 높게 책정되어 있다. 여기에 근육 및 다른 장기에 공급되는 산소를 운반하는 적혈구를 볼 때 남자 대 여자의 비율이 5.5 : 4.9로 남자가 더 높은 수준의 적혈구를 갖고 있다. 산소를 공급해주는 적혈구 수에 있어서 남자에 비해서 여자의 적혈구 수가 낮은 것이다. 적혈구의 산소운반은 적혈구 속에 있는 헤모글로빈이 담당하고 있다. 이 헤모글로빈의 수준도 남자의 것이 여자의 것에 비해서 약간 높은 편이다. 헤모글로빈의 주축은 철분이다. 철분은 아주 강력한 유리기로 작용해서 접촉하는 곳에 산화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필요이상의 철분은 몸의 노화를 촉진하게 되는데, 여자의 헤모글로빈은 남자에 비해서 낮게 책정되어 있다. 즉 여자들의 낮은 적혈구와 헤모글로빈은 신체의 산화작용 수준을 낮게 유지해준다. 즉 여자들의 노화가 남자들에 비해서 덜 진행됨으로 여자가 남자에 비해서 장수를 하기 좋은 조건을 갖고 있는 셈이다.
생명을 유지하는데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서 “연료”가 덜 필요하게 된다.(여자가 남자에 비해서 과체중이 되기 쉬운 또 하나의 이유가 된다. 같은 양의 음식을 섭취할 때 여자에게 남는 열량이 남자에 비해서 높아지게 된다) 이 말은 상당히 깊은 뜻을 갖고 있다. 적은 연료비율로 인한 이점은 삶의 현장에서 발휘된다. 여자는 새로운 환경과 온도차에서 남자에 비해서 더 잘 적응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더위나 추위에 여자가 남자에 비해서 더 잘 견디어내는 것이다. 한 예로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서 땀을 덜 흘리면서 체온조절을 하게 된다.
임신, 분만 및 수유는 여자의 고유기능이다. 남자들은 이런 여자의 고유기능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여자의 고유기능이 과연 여자들의 불리한 조건인가? 임신, 분만 및 수유는 생명현상의 연장이면서 인류의 오늘날을 있게 만든 장본인인 것이다. 이런 인류생존에 가장 필수적인 여자의 고유기능을 폄하하면서 불리한 조건으로 친다면, 얼마나 앞뒤가 맞지 않는 논거가 되는지 잘 생각해보아야 할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난자와 정자를 비교해 볼 때, 유전인자에 이를 운반하는 모토(motor) 뿐인 별 볼품없는 정자에 비해서 난자에는 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모든 영양소들을 갖추고 있다. 용적으로 볼 때 난자는 정자에 비해서 대략 8만 5천 배나 더 크다. 태아가 6주가 지나기 전에는 여자로 남아 있게 된다. 물론 유전인자에 여자와 남자가 되는 유전적인 내용이 실려 있지만, 태아가 6주를 지나면서 남녀가 갈라지면서 태아에도 성별이 생기게 된다.
여자들이 사춘기에 다다르면, 초경을 시작하면서 일 년에 13번 정도의 생리를 갖게 된다. 이어서 임신, 분만, 수유 및 육아를 책임지면서 한 생명을 잉태한 후 독립된 개체가 될 때까지 계속적으로 헌신하면서 가정을 이끌어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남편의 성을 따라가는 것이 상례로 되어있다. 여기에 대부분의 경우에 한 가정의 대표 자리는 의당 남편이 맡게 된다. 한 가정의 세대주가 되는 것이다. 어디인지 잘 맞지 않는 이야기의 내용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경우에 맞지 않는 사실에 대하여 어느 누구 의문의 제기하면서 시정을 요청하지 않은 것이다. 태어난 아이들이 남자의 성을 따라가는 것은 전통과 문화라고 치더라도, 남자들이 세대주로 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로 정착된 것이다.
세대주가 되고 태어난 아이들에게 자기의 성을 주게 되는 남자에 비해서 여자가 열세에 놓이게 된 내력은 사회의 역사, 전통 및 문화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다. 생리적, 신체적 그리고 두뇌의 우열에 따른 이유가 아니고 순전히 역사, 전통 및 문화의 소산인 것이다.
동물 세계를 보면, 체구가 큰 동물이 그 동물 떼를 지배한다. 힘이 세기 때문이다. 다른 신체의 조건이나 두뇌의 기능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내용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인간세계에서도 남자의 체구가 여자에 비해서 크다. 힘이 센 것이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 남자는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아무런 이유도 없다. 남자의 두뇌가 여자에 비해서 클 뿐 아니라, 두뇌의 기능도 여자에 비해서 우수하다는 것은 이제 과학적인 근거를 잃게 되었다. 남자의 두뇌가 여자의 두뇌에 비해서 우세한 면이 없을 뿐 아니라 어떤 면으로 보면 여자의 두뇌가 “삶에 대한 적응력”이 월등한 면을 채워주고 있는 것이다. 남자의 두뇌가 수학적이고 조직력에서 뛰어난 반면에 여자의 두뇌는 감정이입과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면에서 남자에 비해서 뛰어난 것이다.
남자 두뇌의 수학적이고 조직력의 기능과 여자 두뇌의 감정이입과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기능은 상호보완적이라고 볼 수 있다. 어느 한 쪽이 다른 한쪽에 비해서 더 중요하고 뛰어나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극히 자연의 섭리에 맞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남자가 여자에 비해서 우세하다는 입장은 과학적인 사실에 입각한 주장이 아닌 것이다.
삶에 대한 적응력 : 체구가 크고 힘이 강하다고 해서 반드시 불리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체구가 크고 강한 힘을 갖고 있는 동물들이 유리한 때도 있기는 하다. 약한 동물들을 체구와 힘으로 제압하기도 하면서, 한 짝을 이루어 종족을 번식시키는 데에는 유리하게 작용하게 된다. 실지로 커다란 체구의 유전인자가 대를 계속하면서, 그 종류에 속한 동물들의 체구가 점점 더 커지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살아남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구가 크고 힘이 강하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 삶에 대한 적응력이 높다고는 말할 수 없다. 공룡시대에 살던 덩치가 크고 힘이 강한 동물들은 급격한 기후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전멸한 반면에 체구는 작지만 적응력이 뛰어난 동물들은 온 변화에 적응하면서 번창하여 오늘날의 생태계를 이룬 바 있다. 이 점을 보더라도 덩치만 크고 힘만 강하다고 해서 삶에 대한 적응력이 크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경우, 체구가 크고 힘이 강한 남자가 인간사회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 점에 대하여는 어떻게 보아야 하나? 체구가 크고 힘이 강한 남자이기 때문에 삶에 대한 적응력이 높았기 때문인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측면에서 볼 때 남자가 우위에 서있다는 점에 대하여는 하나의 의문점이 있을 수 없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하여는 남자들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여자들도 이 면에 대하여 동의하고 있다. 과연 어찌된 일인가? 남자의 체구가 크고 힘이 강하다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지만, 만약 여자의 체구가 크고, 힘이 강하다면,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한다. 여자는 결코 크면 안 되고, 힘이 강해서도 안 된다는 편견과 신화에 젖어있는 생각 때문인 것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남자들의 주장과 입장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겠지만, 여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할 말들이 있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체구와 힘에 대한 정의는 남자들이 내린 가치관인 것이다. 여자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남자들이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고, 이에 대하여 여자들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체구가 크고, 힘이 강한 사람이 우수한 사람이고, 그 사실 한 가지만으로 지도력을 인정받게 되었던 것이다. 남녀 간에 다른 재산들에 대하여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체구와 힘만으로 한 사회의 지도자 자리를 양보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여자들의 두뇌가 남자들의 두뇌의 크기에 비해서 작다는 사실은 여자들의 사고인식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말해주는 바 되었고, 여자들의 두뇌와 두뇌작용은 남자들의 두뇌와 두뇌작용에 비해서 열등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체구가 크고 힘이 강하다는 것은 그대로 남성의 심벌로 자리 잡게 되면서 남자들의 운동은 그 방면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축구, 레슬링, 권투, 태권도, 야구, 아이스하키 등 남성적인 스포츠는 많은 남자들을 열광케 만들었으며, 남성적인 운동으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스포츠만 잘해도 잘 먹고 잘 산다. 삶에 대한 적응력이 뛰어나게 보이게 된 것이다. 많은 중학생, 고등학생 및 대학생들이 직업적인 운동선수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가장 남성적일 뿐 아니라, 삶에 대한 적응력 또한 뛰어나게 보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수한 운동선수들로부터 높은 삶에 대한 적응력을 볼 수 있을까? 직업적인 운동선수들은 선수생명이 다 끝난 다음에는 격심한 운동으로 인하여 마모된 관절과 근육의 약화로 많은 고생을 겪게 된다. 결과적으로 운동부족으로 이어지면서 각종 성인병에 걸리게 되면서 수명을 재촉하게 됨을 많은 사람들이 익히 알다.
총기를 비롯한 각종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남자들이다. 체구가 크고 힘이 강함을 추구하는 남자들은 본인의 체구와 힘만으로는 안 되겠다 싶으면, 사용하는 것이 각종 무기들인 것이다. 체구의 크기와 힘을 재어보는 경기가 아니라 체구의 연장인 무기를 사용하면서라도 우위를 점하고 싶은 심정에서 무기를 손에 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여자들은 무기를 손에 잡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큰 체구와 강한 힘에 의존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무기에 의한 희생을 당하는 것은 거의가 다 남자들이다. 체구와 힘에 대한 겨루기를 하면서 살아가는 남자들의 모습은 오는 변화에는 관심이 없이 체구와 힘만 불리기에 여념이 없었던 공룡들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한 생각을 해 보아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장면인 것이다.
한편 여자들이 추구하는 바는 체구의 크기와 강한 힘이 아니고, 생활 그 자체에 대한 내용으로 되어있다. 결혼, 임신, 출산 및 육아와 같은 인생살이에 관심이 더 많은 것이 여자들인 것이다. 생활과 인생살이 그 자체에 대한 대비를 하는 여자들과 체구의 크기와 강한 힘을 추구하는 남자들 사이에 누가 인생의 주역으로 등장하는지에 대한 답변은 자명하다고 볼 수 있다. 여자들이 남자들에 비해서 더 강한 삶에 대한 적응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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