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과생활습성 | 양질의 혼자 있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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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준남 작성일13-02-22 09:01 조회524회 댓글0건본문
가) 자신을 찾음 : 앞에 언급한 긍정적인 대인관계라는 제목에서는 사람들과 같이 어울려서 살아야 면역성도 올라가고 또한 건강과 장수를 바라볼 수 있다는 내용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찾아야 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자신을 찾는다는 명제는 깊다. 우선 자신을 찾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자신을 찾는 길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무조건 유행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유행을 만든 사람의 뜻을 그대로 쫓아가는 사람들이 된다. 다른 사람들과의 동류의식 속에서 편안하게 되는 사람이다. 무비판적으로 남의 의견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도 자신이 없는 사람이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감상하더라도 비판적(critical)으로 감상해야 한다. 행간을 읽으라는 말의 뜻과 같다.
게으른 사람도 자신을 찾지 못한 사람이다. 주어진 사명을 깨닫지 못할 때 게을러지는 것이다. 반면에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보는 사람도 진실한 자신을 찾지 못한 사람이다.
세상이 얼마나 큰지 알고 난 후 자신이 그 큰 세상의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모를 때, 모든 것을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되는 것이다.
남을 용서해주지 못하는 사람도 자신을 찾는 인생이라고 볼 수 없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고 남과의 사이에 일어났던 일이 반드시 나쁜 일은 아니라는 인식이 될 때 남에 대한 용서를 해 줄 수 있게된다. 반대로 자신에 대한 확신도 없고 나와 남 사이의 관계가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모를 때 아집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자신을 찾았다고 볼 수 없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의탁 받은 것임을 알게 될 때 자유롭게 된다.
얼마 전에 미국에서 두 번 째로 부자인 워렌 버펫이라는 사람이 첫 번 째 부자인 빌 게이츠 재단에 310억 달러를 기부하면서 옳은 곳에 써 달라고 해서 큰 뉴스가 된 적이 있다. 버펫은 그처럼 큰돈을 내어놓으면서 자손들에게 돈을 남겨주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큰 사람이 하는 말이다. 의탁을 하는 재산에 대한 처리를 좀 더 나은 사람이라고 여긴 사람에게 내어 준 것이다. 큰 나라에는 큰 사람이 있다.
사람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한다. 누구로부터 사랑을 받나? 사람을 만들어 낸 창조주로부터 사랑을 받고 또한 이웃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그러므로 나도 나를 만들어 낸 창조주를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면 된다. 아주 쉬운 공식이다. 나를 제대로 아는 자세인 것이다.
한국 고어 중에 "사랑"이란 말은 "생각한다"는 뜻을 갖고있다. 사랑이라는 행동에 옮겨가기 전에 우선 생각을 해야하기 때문에 생긴 말이 한국 고어인 "사랑"인 것이다. 생각하는 사랑에 행동하는 사랑이 따를 때 온전한 사랑이 된다.
나 이외에 창조주가 있고, 다른 사람들이 있고 또한 그 넓은 세상이 있음을 아는 것이 자신을 찾는 길이다. 사람은 사랑을 할 때 자신을 찾게된다.
사랑을 해 본 사람은 사랑의 느낌을 안다. 사랑이라는 감정으로부터 생긴 느낌은 따듯하고, 조용하고, 잔잔하고, 깨끗하다. 충동적이지 않고, 난폭하지 않고, 타산적이지 않고, 말을 막 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최근의 뇌인 대뇌피질과 오래 된 뇌인 변연계가 같이 만들어내는 감정이다. 사랑은 그 자체가 깊고, 또한 사랑은 사려가 깊다. 사람은 늙어가면서 사랑의 짜릿한 느낌을 잊어가게 된다. 여기서 나온 말이, "첫사랑을 찾아야 한다"는 외침인 것이다. 사랑을 잊은 사람은 늙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사랑을 찾은 사람은 새 사람이 된다.
남녀간의 사랑은 사랑이라고 하기보다는 애정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모성애도 남녀간의 애정이나 마찬가지이다. 좁은 의미의 사랑이다. 따라서 여기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남녀간의 사랑이나 모성애를 포함해서, 더 큰 범위의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100세인들이 되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될 때, 이 세상은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변해질 것이다.
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인식 : 엔트로피에 대한 이해를 하면 시간에 대하여 알게된다. 열역학 제 2 법칙은 에너지는 높은 곳으로부터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쌓이는 것이 엔트로피이다.
엔트로피가 쌓인다는 것은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고,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는 뜻을 갖고있다. 따라서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기 마련이다. 시간은 어디서부터 시작이 되었고 어디서 끝이 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시작한 곳에서 끝이 난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단순화시킨 엔트로피와 시간의 개념이 될까?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단순화된 생각일까? 엔트로피와 시간을 말하면서 왜 곳(장소)을 말하게 될까?
시간 하면 장소가 생각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시작된 곳에서 끝이 난다는 생각보다 더 복잡한 생각을 할 수 없는 한계를 갖고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두뇌에 있는 뇌 세포의 숫자는 약 1천억 개 정도라고 한다. 상당히 많은 숫자임에는 틀림없다. 이 뇌 세포들 사이에 학습과 경험에 의해서 연결(synapse)이 이루어지면서 지능의 발달이 오게된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연결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한계점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인간의 두뇌로는 어느 한계를 벗어나는 것에 대하여는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그 범위 내에서 생각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이 바로 시작된 곳에서 끝이 난다는 시간개념이라고 보는 것이다.
또 한가지의 이유로는 시간에는 공간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졸업식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은 졸업식 장면이지 그때의 시간으로 떠오르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은 서로 얽혀있다. 우리는 시간 하면, 공간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시공(時空)이라고 한다. 시간과 공간을 떼어놓으려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다음에 오는 시간의 요소로 주체가 있다. 공간 하면 우선 장소를 생각하게 되고 그 장소의 주체를 생각하게 된다. 시간과 공간에는 주체가 있는 것이다. 주체가 없으면 시간과 공간은 없게된다. 다시 말한다면 시간과 공간은 주관적인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객관적인 시간과 공간의 개념도 있다.
이 둘 사이를 제대로 알 수 있게될 때에 우리 자신이 주체가 된 시간과 공간임을 인식하게 되면서 자신을 찾게되는 것이다. 주관적인 시간/공간이 객관적인 시간/공간과 일치하지 않을 때가 더 많이 있다. 이 둘을 일치시켜 가는 과정이 어렵기는 하지만, 이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 가는 것이 인생인 것이다.
우리는 단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살면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의탁 받은 시간만 있다. 내 시간이 아니고 다만 주어진 시간을 잘 쓰라고 의탁 받았을 뿐인 것이다. 우리 자신의 시간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우리에게 의탁된 시간임을 알아 차려야 한다. 이 시간을 꽉 채워서 보낼 수도 있는 반면에, 비인 채로 보낼 수도 있게된다.
채워진 시간이란 무엇인가? 꽉 채워진 시간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는 인류의 선생들이 가르친 바 있다. 공자는 인(仁)과 성실(誠實)이라고 했고,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알라고 했고, 석가는 공(空)과 자비(慈悲)라고 했고, 예수는 구원과 함께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다. 역사의 축을 이루는 선생들의 말씀인 것이다. 그 이후로 이런 가르침보다 더 발전된 가르침은 없었다. 그래서 역사의 축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제 새로운 역사의 축을 찾아야 할 때가 왔다. 인류의 선생들이 가르치신 꽉 채워진 시간을 채워가는 실천의 때가 온 것이다.
다) 뜻을 찾는 인생 : 100세인은 되어가지만, 왜 100세인이 되어 가는 지에 대한 뜻을 모르고 100세인이 되는 것처럼 허무한 일도 없을 것이다. 비좁은 세상을 더욱 비좁게 만들어갈 뿐이기 때문이다. 100세인이 되어가지만 그 뜻을 제대로 찾아야 100세인이 100세인이 되는 보람이 있게 될 것이다.
100세인 운동은 지혜롭게 되자는 운동이다. 따라서 나이, 성별, 인종, 사회나 국가에 차별을 둘 수 없게된다.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지혜롭게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100세인이 된다는 목표에만 연연하다보면 중간에서 끝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100세인 운동은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빅토 후랭클의 뜻을 찾는 치료법(logotherapy)은 인생에서 뜻을 찾아야 치유가 일어난다는 내용이다. 치유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변해있는 모습으로부터 원래 주어진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이 치유인 것이다. 그런데 후랭클은 치유가 일어나려면 뜻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즉 뜻을 찾는 과정이 치료가 되고 그 결과로 나오는 것이 치유라는 것이다.
치료와 치유는 다르다. 치료행위는 누구나 할 수 있으나 치유는 본인 스스로 해야한다. 여기서 치유는 결과가 아니고 과정이라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어떤 병에 걸렸을 때 편안한 마음으로 그 병에 대한 태도를 갖게될 때부터 치유는 시작되는 것이다. 시작된 치유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에 대하여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결과에 치우치게 되는 치유는 제약을 받게된다. 과정에 중점을 두는 치유는 진전될 수 있으나 결과에만 치우치는 치유는 중간에서 걸리게 될 수 있다. 치유는 자유스럽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는 말은 참된 뜻을 찾는다는 내용이다. 왜곡된 사실은 진리가 아니다. 따라서 참된 진리를 찾는 과정이 있어야 치유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치유를 구하는 사람들은 참된 진리를 갈구하면서 이를 찾아서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다. 갖고있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길을 떠나는 사람들인 것이다. 쉽지 않은 결정이다. 그러나 쉬운 길은 누구나 걸어가는 길이다. 쉽고 곧은 길이 반드시 좋은 길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골라서 걸어가는 길이다. 짧으나 굵은 인생도 살아 볼만한 인생이다. 그러나 길고 가늘면서 보람된 길을 찾아가는 길도 있다. 돌아서 가는, 멀고 먼 길을 걸어가려면 여간한 결심으로는 이루지 못하는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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