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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꾸는 꿈 | 융의 심리학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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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준남 작성일12-12-15 05:07 조회4,2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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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계 21 : 3)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 46 : 10)

  융은 스위스에서 태어나 의과대학을 나온 후에 정신과 의사로서 많은 정신질환 환자들을 진료했다. 그러던 중 심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여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깊은 경지의 연구실적을 쌓아가게 되었다. 융의 심리학에 대한 많은 연구 부분은 그가 직접 진료한 환자들을 통해서 얻은 체험적인 지식과 연구실적이다. 그는 30여 권이나 되는 많은 책을 썼으며, 그가 쓴 책의 깊이와 내용은 아직까지도 연구의 대상이 될 정도로 무게가 있고 광범위한 것이다.

심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중 융 심리학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을 융 학파(Jungian)라고 부른다. 이들은 전세계적으로 널리 퍼져있으면서 독특하지만 설득력 있는 심리학을 전파하고 있다. 
한 때 후로이드 심리학이 전세계를 휩쓸었지만, 이제는 융 심리학이 후로이드 심리학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있다.

융 심리학을 공부하려면 지금도 스위스의 쥬리히까지 가야한다. 융의 방대한 저서를 다 읽어서 이해하려면 일생이 걸린다고 한다. 그만치 넓고 깊은 내용이기도 하지만 융의 저술들은 읽기가 아주 난해하여 도중에 포기하기가 일 수이다. 여기서 융 심리학에 대한 대충을 소개하기로 한다.

심리학 중에서도 융의 심리학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해야만 꿈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된다. 후로이드와 융은 동시대의 사람들이다. 후로이드는 억압된 성(sex)을 너무나 강조함으로 꿈 연구가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한다. 마찬가지 이유로 융도 후로이드로부터 멀어진다.

처음에는 융도 후로이드에게로 가서 심리학과 꿈에 대하여 배웠다. 그러나 후로이드의 너무나 일방적인 성과 억압이 주를 이루는 심리학과 꿈에 대하여 실망하고는 후로이드와 결별을 선언한다. 후로이드와 결별한 후 융은 독자적으로 심리학과 꿈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정립해 나가기 시작하여 독자적인 심리학과 꿈에 대한 영역을 정립하게 된다. 융은 현재로서 심리학과 꿈 연구가들에게 가장 영향을 크게 끼치고 있다. 

모든 종교 특히 기독교와 심리학 사이에 겹치는 영역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융의 업적을 빼어놓고는 논의가 힘들 정도로 융의 심리학과 꿈에 대한 연구는 중요한 것이다.

그는 인생을 두 시기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인생의 전반부는 외부의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고 외부로부터의 지식흡수에 전념하면서 자신을 정립하기에 많은 노력을 한다고 설파했다. 따라서 외부에 대한 관심이 많지만, 아직 내 자신에 대하여는 자신이 덜 서있게 된다.

그러나 인생의 후반부에 들어서는 인생에 대하여 자신의 정립은 끝난 시기이고, 자신의 내부로 눈을 돌리면서 인생의 뜻을 찾는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인생의 전반부에 속해있을 때에는 유행에 민감하게 되고 남의 눈초리에 약한 편이다. 그러나 인생의 후반부에 들어오면, 내 자신의 문제가 더 심각해지기 시작하며, 남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에 대하여는 비교적 대범하게 된다.
인생의 후반기에 이르게 되면, 인생의 뜻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많은 사람들이 창조적인 활동을 하게된다. 예를 든다면, 그림을 그린다든 지, 사진촬영에 몰두한다든 지, 글을 쓴다든 지, 무언가를 함으로서 내면세계의 충족을 추구하게 된다. 마찬가지 이유로 종교적이 됨으로서 자신을 찾으려는 노력과 함께 인생의 뜻을  찾으려고 한다. 이때 인생의 뜻을 찾지 못하게 되면 내부로부터 올라오는 괴로움을 잊으려는 행동들이 나오게 된다. 

인생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어떤 특정한 나이로 가를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젊은 나이에 인생의 뜻을 알려는 노력을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도 아직 유행에 민감하고 외부세계의 문물에 예민한 반응을 보여주게 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누구든지 인생의 뜻을 찾으려는 노력의 시기가 오게 마련이다. 여기서 젊은 늙은이가 있고, 늙은 젊은이가 있다는 말이 생기게 된 것이다.

종교인들은 인생의 전반부에 속한 사람이나 아니면 후반부에 속한 사람들이거나를 막론하고 뜻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 도움을 주면서 그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융은 말하고 있다.        

융은 BBC 방송과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인생의 뜻을 찾지 못하면 견디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종교는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종교는 새로운 변화에 대하여 생리적인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과학을 포용하지 못해 온 기독교 역사가 이를 웅변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4세기경에 당시의 교부들은 세상이 변해가면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인생의 틀을 만들어 주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들은 헬라철학의 표현을 배경으로 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적인 경험이란 자유스러워지고, 해방되고,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험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린 후에야 가능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예수의 실체는 하나님의 실체와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 실체(substance)란 헬라어에서 유래한 말이면서도 그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실체란 내면 세계의 궁극적인 것을 의미하고 있다. 즉 가를 수 없는 최후의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인류는 최후의 가를 수 없는 것을 원자라고 착각한 시기가 있게된다. 즉 물질을 그 이상 더 작게 자를 수 없으면서 그 물질의 특성을 간직할 수 있는 단위를 원자라고 불렀다. 

내면세계의 궁극적인 것과 혼돈이 오는 장면이다. 왜냐하면 나중에 더 자를 수 없는 원자가 잘라져서 에너지로 변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아인스타인의 E=mc2라는 공식에 허무하게 허물어지는 원자의 모습을 보고 내면세계의 궁극적인 것인 신에 대한 혼란이 오게된다. 여기서 사람들은, 그렇다면 내면의 궁극적인 것이란 에너지를 의미하는 것인가?라는 질문 속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문제 중의 하나는 이런 실체에 대한 일반인의 질문과 혼란에 대하여 기독교에서 명쾌한 답변을 내려주지 못하는데 있다. 기독교에서는 너무나 큰 변화가 너무 빨리 오는데 대한 경외감으로 감탄만 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남의 일처럼 구경 만하고 있는 기독교 신학교에서는 성경을 떠난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실체가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이에 대하여 형이상학적으로 인식시킨다. 왕 중 왕이 누구인지, 왜 그가 왕 중 왕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명쾌한 답변은 안 해주고, 왕 중 왕에게 충성을 바치라는 말속에 자신을 집어넣은 후 이를 강요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과학발달의 이유와 동기를 제공해 준 기독교에서 눈부시게 발전하는 과학에 놀라기만 하면서 과학발달의 결과로 나타난 현상에 대한 뜻을 내려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과학에 대하여 외면을 하고 있다. 같은 맥락으로 기독교에서는 심리학에 대하여도 이를 외면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에서 현상세계에 대하여 어떤 뚜렷한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은 성경 안에 그 해답이 있다고만 말해줄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인간을 무의식으로 인도해 줄 수 있는 종교의식도 점점 희미해지면서 거대한 교회건물, 화려한 내외부 장식, 소위 멀티 미디아를 통한 대중적인 접근 등에는 눈을 돌리고 있지만 인간의 내면세계로부터 오는 갈급에 대해서는 거의 채워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기독교가 직면하고 있는 디렘마인 것이다.

융의 신앙심 : 

지금도 스위스 쥬리히에 있는 융이 살던 집에 가보면, 하나님은 찾건 안 찾건 간에, 계시다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이는 융이 일생동안 갖고있던 삶의 지표였다. 한시라도 하나님을 잊은 적이 없었다.
융이 후로이드와 다른 점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었다. 그는 그의 자서전을 통해서 말하기를, 나는 항상, 꿈과 이상과 목소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살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점이 바로 융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점이다. 과학자이면서 경험을 토대로 공부하는 융이 하나님과 항상 대화를 하고 지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융은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이외의 다른 어떤 명칭도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융은 모든 사람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 그의 심리학은 바로 이런 인간들의 꿈을 도와주는 도구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 점이 다른 심리학자들과 다른 점이다.

스위스에서 태어난 융은 성공회 신부인 할아버지와 성공회 신부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는 환경으로부터 시작하여 일생동안 깊은 신앙심을 키워간다. 그러나 그의 심오한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기독교로부터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한 바 있다. 이 점에 대하여 융은 아주 섭섭하게 여기게 된다. 기독교에서 융과 융의 심리학을 이해하지 않았던 것이다. 융은 기독교에서 인간들의 영혼을 잘 보살펴주기를 원한다. 모든 종교 특히 기독교는 인간들의 내면세계를 깊이 있게 다룰 수 있음을 갈파한다. 일생동안 융은 인간의 영혼과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연구한 바 있다. 

융은 심리상담자들이 인간들의 마음의 병을 고쳐주는 것과 같이,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은, 구조적으로 갖고있는 심리치유적인 상징성으로 인하여, 인간들의 마음과 영혼까지도 다루면서 마음과 영혼의 병을 고쳐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역설했다. 융은 인간들은 일생동안, 알고 모르고 간에, 심성발달의 도모에 매진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인생의 뜻을 알려고 노력하게 된다고 말했다.

융의 가치는 여기에 있다. 기독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계 21 : 3)라는 뜻과 잊혀진 내면세셰의 궁극적인 것을 찾아주어야 한다고 융이 말하는 내용이 일치하고 있다. 융의 말에 한번쯤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심리학 중에서도 융의 심리학은 일반에게 점점 대두되고 있으며, 또한 일부에서이지만 기독교에서도 그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이유는 융의 심리학은 인간의 내면세계의 궁극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지금 당장  또한 바로 이 자리에서라고  말하면서 내일 어떻게 될 것이다.라는 답변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현재의 생활 속에서 인생의 뜻을 찾으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설령 생활 속에서 찾은 인생의 뜻이 어렵더라도 이를 견딜 수 있지만, 해답이 아예 없는 입장에 대하여는 참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물질주의에 물 들어는 있지만 사람들은 궁극적인 답변에 목말라하고 있는 것이다. 물질에 매달려있다보면, 더 심각하게 반동적으로 인생의 뜻을 찾게되면서 궁극적인 해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많은 현대인들이 불안증과 우울증에 빠지면서 밤중에 잠 못들어 하는 상태에 빠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고, 인생의 뜻을 찾을 수 없는 삶에 지쳐있기 때문인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도 그렇고 미국에서도 그렇지만 기독교 인구가 계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유럽에서는 기독교가 이제는 건물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사람들은 애매한 답변에 등을 돌리고 인생의 뜻을 알려주는 곳을 찾아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세 단계를 통해서 이해를 하려는 시도가 있다.

첫째, 중세까지의 기독교는 교회에서 가르쳐주는대로 믿으면 되었고 이를 강요했다.
둘째, 중세 이후에 있었던 개신교 종교개혁 이후로는 성경을 기본으로 한 신학자들의 믿음에 대한 정립을 그대로 쫓아가면 아무런 무리가 없었던 시기가 있었다. 
셋째, 현대인들의 믿음의 자세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요구하면서 신앙적인 경험을 갖기를 원하고 있는 자세이다. 이 자세는 교육의 차원을 넘어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바로를 갈망하는 현대인들의 속도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초대교회 때의 평신도들은 오늘날과 같은 시설도 없었고 또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교회조직도 오늘날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 의 기독교는 요원의 불같이 퍼져 나갔다. 그 원인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당시의 기독교도들은 개인적인 경험을 하고 있었다. 즉 신앙적 경험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가졌던 것이다. 이런 믿는 사람들이 발휘할 수 있는 힘은 정말로 막강했다. 이들의 전도는 힘이 있었다. 목숨을 내어놓고 믿음을 갖고 나아가려는 힘 앞에서는 어떤 장애물도 장애물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초대교인들은 현대인들이 바라는 신앙생활과 맥락이 통하는 신앙생활의 자세를 갖고있었기 때문에 위와 같은 결과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융은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한다라고 믿는데 대하여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해주고 있다. 

예수가 예수됨은 결과론이다. 누구라도 예수처럼 될 수는 없다. 예수는 인간들에게 하나의 예를 보여준 것이다. 융이 보는 견해는, 인간은  모두가 본인 스스로 타고난 재능과 사명이 있다. 주어진 재능과 사명을 다 하려고 노력하는 것뿐이다.  인간은 누구라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될 수는 없다. 예수는 좋은 표본을 남겨주었고, 사람들에게 예수의 인생을 살아가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이다.

융은 BBC 방송과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다음과 같은 답을 한다.

BBC 방송 : 융 박사 당신은 하나님을 믿음을 믿습니까?‚
융 : 한참 생각하다가, 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융은 그의 말년에 자서전을 쓴다. "기억들, 꿈들, 반영들(memories, dreams, reflections)"은 그가 근 86세의 나이로 1961년, 죽기 2년 전에 탈고를 한다. 이 자서전에는 그의 일생에 대한 갖가지 사건을 깊이 있게 다룬다. 융에 대한 이해를 하려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그 책에는 그가 후로이드와 헤어지게 된 동기와 헤어진 후의 심정을 자세히 기록해 놓고있다. 그의 무의식에 대한 연구와 무의식으로부터 의식이 나올 수밖에 없는 그의  이론배경에 대한 자세한 언급을 해 놓고있다.

융의 무의식에 대한 이해는 그대로 그의 꿈에 대한 이해로 연결된다. 즉 융이 설명하는 무의식으로부터의 꿈이라는 그의 이론을 이해하려면, 그의 무의식에 대한 이해를 해야하며, 그의 연금술에 대한 연구결과, 꿈의 상징성에 대한 이해를 심도 있게 알아야 한다.

융의 심리학과 꿈에 대한 융 이론의 개요를 알아 본 것이다. 그의 심리학은 인간의 내면세계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따라서 융의 언어를 이해해야만 융의 심리학과 꿈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융이 말하는 성격형성, 의식, 무의식, 개인 무의식, 총체적 무의식, 상징, 연금술, 신화 및 동화, 꿈, 꿈 해몽 및 융 심리학이 기독교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 등에 대하여 알아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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